진리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셨다. 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한다는 말씀도 있다. 내가 다닌 대학의 모토는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었다. 20세기 이후 상대주의 시대를 맞아 진리의 상대성이 종종 논의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든 이즈음, 진리는 자신의 깜냥대로 자신의 주관을 세워 큰 목소리로 외치면 그냥 그대로 진리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다. 그렇다. 자기 자신이 그렇게 믿고 느낀다는 게 진리 판별의 중요한 기준이 된 것 같다. 우리가 익히 듣고 배워온 진리에 대하여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지만 나는 성서학자로서 무엇보다 성서의 말씀을 진리의 기준으로, 나아가 진리 자체로 받아들여 그 진리성을 분별하고 평가하는 일에 골몰해왔다. 굳이 이런 개념 정의를 종교적 진리, 기독교적 진리라고 그 반경을 제한한다고 해도 수긍할 수 있다.
내가 도무지 감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진리를 거슬러 역행함으로써 진리값을 주장하는 무리들의 행태다. 성서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그 말씀을 툭하면 인용하면서 엇비슷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싶더니 그 끝에서 희한하게 어긋난 꼴을 보이는 것, 그것이 이단이다. 이단은 끝이 다른 경우이니 끝까지 면밀하게 살피는 게 중요하다. 기성 기독교 울타리 바깥에서 이미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공인된 이단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기성 기독교 내에 성서의 진리를 앞세워 그 진리의 기준대로 행하지 않고 온갖 무리한 억설과 편향성으로 진리의 권위를 훼손하는 잠재적 이단성향도 조심해야 한다. 진리의 심연에 수많은 빛의 발광체들이 반짝거리고 있지만 적어도 진리를 거스르면서 진리값을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리는 흉내의 대상이 아니라 그 검증되는 진리의 층위에 비례하여 점점 더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이단의 특징디모데후서 3장은 진리를 대적하고 모세를 대적한 두 사람의 사례를 소개한다. 이들은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경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나아가 비슷하게 따라하면서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의 유형이기도 하다. 그 이름은 얀네와 얌브레다. 이 두 사람이 특별히 수상한 것은 그 이름이 성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언제 어디서 모세를 대적했는지, 어떻게 진리를 대적했다는 건지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두 사람을 언급한 것은 신구약성서 중간기 유대교 전통 속에 이들의 이름이 꽤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탈무드와 미드라쉬 등 유대교의 관련 자료를 섭렵해보면 얀네와 얌브레는 출애굽기 7장 11절에서 바로의 호출을 받아 모세가 아론의 지팡이로 뱀을 만들 때 자기들의 지팡이를 뱀으로 변신시킨 그 애굽 요술사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비슷하게 흉내 내어 뱀을 만들어냈지만 그 뱀이 아론의 지팡이가 변한 뱀에게 잡아먹히게 됨으로써 그 끝이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판명되었다. 경건의 모양은 꾸며 폼은 잡았지만 그 능력에 있어 완전히 실격자로 드러난 것이다. 이후 이들은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는지 최초의 유월절 다음 날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렬에 동참한 것으로 전해진다. 겉으로 봐서 회개의 영이 임해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자신들의 가짜 마법을 청산하고 구원의 역사에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내산 광야에서 계명을 받기에 앞서 모세를 기다리지 못한 채 조바심을 내서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도록 부추기고 선동한 자들이 한 전승에 의하면 이들 얀느와 얌브레였다고 한다. 이들이 변화하면서 보인 행보 속의 시작은 그럴싸했는데 뒤끝이 이상하게 마무리된 것이다.맹목적인 반(反)-진리이단의 교주로 자처하거나 이단세력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성서의 진리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심보다 그 진리를 유사하게 흉내 냄으로써 어떻게 써먹을까에 골몰한다. 진리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면서 진리성을 압도하다 보니, 앞의 경우에서 보듯, 진리의 궤도에 접어들어 동행하는 듯 보이지만 그 종말은 전혀 딴판으로 드러나 오히려 진리를 거스르는 반역의 자리에 서게 된다. 신약성서에서 이단의 선구자(?) 격인 인물은 그 이름도 시사적인 시몬 마구스이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성령의 진리 자체보다 그러한 권능을 손쉽게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돈을 써서 그 권능을 물건 구매하듯이 사고자 했다. 그의 마음이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그 악한 마음은 그야말로 망할 징조였다. 베드로는 그런 어투로 시몬 마구스를 질타했다. 성령 체험을 목격했다면 성령의 진리값, 진리성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거늘, 그는 그 성령을 통해 뭔가를 제 몫의 성취로 챙기고 싶어 했다. 그러니 기독교 진리의 ‘도’에 아무런 관계가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다는 베드로의 진단이 딱 맞는 격이다.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를 기대했다. 그 악독하고 불의한 마음마저 주께서 혹 긍휼을 베풀어 용서해주길 바랐다. 이러한 동정의 논평에 대한 시몬 마구스의 응답이 어떠했을까.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였다. 실소가 삐져나올 정도로 코믹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끝까지 기독교 신앙의 언어를 모방하고 있는 셈인데, 그 구석에 견고하게 똬리를 튼 심성인 즉 누구든 자기편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응석받이는 이단으로 흐르거나 이단세력의 포로가 되기 쉽다. 진리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맹목적이고 유아적이므로 미혹과 자기기만에 쉽사리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진리 앞에 겸손하기우리는 진리의 절대적 담지자가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흠결 많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인간으로 추구하는 진리는 늘 질문과 성찰의 자리가 필수적이다. 절대 진리로 상정한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인식과 이해의 자장 가운데 육신을 얻어 납득되기까지 따져야 할 것도 많고 짚어야 할 것도 많다. 설사 납득되고 설득된 진리라 할지라도 인간과 세상이 꾸준히 변화하니까 다시 또 성찰하고 궁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진리 앞에 겸손하게 묻는 훈련이 진리를 수호하고 변증하는 노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간의 지성과 소통해야 하는 진리는 채워야 할 틈새가 많기 때문이다. 성서의 진리에 대한 해석이 그 대표적인 예다. 성서의 구절들에 대해 수많은 분석과 해석을 해왔지만 여전히 그 진리가 마르고 닳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단이라 일컬어지는 부류는 이 틈새의 작업에 소홀하며 성마른 목표의식에 매달려 충분히 상상하지 못하고 깊이 사색하지도 못한 채당의정처럼 포장된 단 하나의 정답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니 진리에 대적하는 방식으로 진리의 유아독존 식 주장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성근 알레고리의 수법으로 성서의 비유를 해석한다든지, 자신의 조직을 옹위하는 논리라면 온갖 억지와 강변을 동원해서라도 정당화하며 기계적인 단순요법을 제시하는 행태라든지 모두 설익은 수법에 불과하다.진리 앞에 겸손하려면 그 진리가 나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에도 유념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진리와 성찰의 거리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릇의 쓸모는 그 한 가운데 텅 빈 공간이듯이, 진리다운 진리의 쓸모는 어쩌면 나에게 아무런 실익을 주지 않는 그 쓸모없음의 쓸모에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나의 현재 실존을 뒤집고 준엄하게 문책하며, 내가 신앙생활의 이름으로 진리를 받들고자 하는 열심마저 무로 돌리는 급진적인 전복성을 요구할 수 있다. 나의 귀에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자장가처럼 진리를 자의적으로 편취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양약이 입에 쓴 이치 그대로다. 나아가 내가 속한 조직체의 이익에 반할 수 있는 것이 진리의 속성이고 심지어 그 조직의 해체를 요구할 수 있는 게 그 앞에 겸손하고자 할 때 우리가 받는 진리의 도전능력이다. 이단은 이 모든 지극히 당연한 틈새의 물음과 성찰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얀네와 얌브레처럼 눈속임으로 진리를 대적하거나 시몬 마구스처럼 진리를 팔아 무슨 이익을 도모하고 진리의 후광을 빌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면 기성 교단에 속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역시 언제든지 이단의 잠재적 미끼를 물 수 있다. 늘 깨어 근신하는 자만이 현명하게 이단의 미혹을 떨쳐버리고 진리 앞에 겸손히 구도자의 길을 간다. 매일 제 삶의 낯선 곳을 발견하며 진리의 초기값으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자만이 진리의 서늘한 초기증상을 되풀이하여 참신하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