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하셨고, 그 ‘반석’은 그분 자신이시며 또한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축소되고 왜곡되고 능력과 영광을 잃고 비참해지는 것은, 교회가 자신이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축소하고 왜곡하고 더럽혔기 때문이다. 복음을 축소하고 왜곡하면, 그 복음 위에 선 교회는 축소되고 왜곡된다. 그 시대의 교회의 크기와 영광은, 그 교회가 깨닫고 누리고 소유한 예수 그리스도의 크기와 영광 만큼이기 때문이다.오늘날 흔한 ‘성공의 복음’은 종종 이단 사이비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은혜로운 탐욕’ 또는 ‘탐욕스러운 은혜’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이는 유다서가 말하는 ‘은혜를 탐욕거리로 변질시키는’ 위험, 거짓 가르침의 경계에 서있는 ‘제한되고 혼합되고 변질된 복음’에 일치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선택과 행위는 그 어떤 경우에도, 불법이어도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도, 결단코 자신의 ‘탐욕’을 놓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변질된 복음에서 돌아서야 한다.그래서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복음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칭의’의 복음만큼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죄인임을 확인’해주는 교리도 없다. 죄인 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선포하는 칭의의 복음만큼,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은혜의 선물임을 알려주는 교리도 많지 않다.하지만 ‘칭의’의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한하고 영원한 깊이와 크기와 넓이와 영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서 ‘칭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특별히 ‘유대교의 율법, 옛 언약의 율법’과 부딪혔을 때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정리된 복음이다. 율법 아래에서 가장 집요한 관심은 ‘의’(義)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복음이 율법과 부딪히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물로 주어지는 의, 칭의’가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음을 ‘칭의’로 설명하는 논증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외에 신약의 다른 본문들에 많이 부각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예컨대 공동서신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유대교의 율법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을 주로 ‘칭의’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또 다른 면을 드러내야 할 절박한 상황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서신의 저자들인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유대교보다는 그들에게 더 이질적이고 위협적이었던 ‘로마라고 하는 세상’에 부딪히면서, 그들이 갖고 있었던 새 언약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해야 했다.그래서 공동서신의 복음은, 새 언약의 성취에 따른 ‘영원한 속죄’뿐 아니라, ‘마음에 심긴 말씀’이라든지, ‘썩지 아니하는 씨앗으로 거듭남’이라든지, ‘영원한 생명’이라든지, ‘열방의 회복’이라든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라든지,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음을 강조하는 것이다.오늘날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칭의’의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하지만 그 ‘칭의’의 복음조차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복음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오직 성경, 전체 성경으로 돌아가는’ 참으로 종교개혁의 후예다운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계시는 경험되어야 하지만, 그 어떤 경험도 계시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값지고 유익하지만, 그 전통 자체가 복음의 전모를 가리거나 대치하거나, 성경 전체를 제한하거나 대치하게 되는 것은, ‘성경의 절대권위’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종교개혁자들을 기리는 참된 신앙이 아니다.종교개혁의 결과로 정리된 복음을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서처럼 한 개인이 걸어가는 천로역정의 길로 묘사하는 것은 영원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구원’이라는 주제가, 중세의 전체적인 우주관이 무너지면서 비로소 ‘개인의 발견’이 시작되었던 16세기 근대의 문명, 인문학과 계몽주의 발흥이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가장 적실하고 효과적인 복음의 형태였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근대적 개인’이 이제는 ‘하나의 독립적인 우주’처럼 취급받는, 그래서 극도로 개인적인 사회인 후기현대사회의 ‘파편화된 세상’ 속에 처한 교회에게, 그런 식의 ‘개인적 구원의 서정’은 얼마나 적실할 것인지도 물어야 하는 것이다.새 언약의 성취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신약성경은 얼마나 자주, 우리의 구원이 애초에 ‘공동체적’이며 또한 ‘우주적’인 것임을 선포하는가! 영원한 속죄의 복음과 함께,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돌판이 아니라 새 언약 백성의 심령에 심기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임재는 돌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새 언약 백성 안에 거하신다. 새 언약 백성인 교회는 그렇게 ‘진리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새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들 안에 심겨진 말씀과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새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오랜 꿈이었다.이것이 곧 ‘교회 자신’이, 지금도 썩어짐과 허무에 굴복하며 ‘하나님의 자녀들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이 피조세계 앞에 선포된 복음, 기쁜 소식인 것이다. 이 소망은 새 언약 백성인 새로운 제사장 나라를 통해 돌아오는 열방, 그리고 이로써 높아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영광을 통해,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 때에 죄와 죽음과 하나님의 부재(不在)가 사라진 그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는 그 날’에, 부활 육체를 받아야 완성되는 ‘나의 구원’도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선포하는 온전한 복음의 큰 그림은 이렇듯, 단지 한 개인이 걸어가는 칭의, 성화, 영화의 길만이 아니라, 새 언약 백성으로서 열방의 회복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창조의 완성 속에서 자신의 구원의 절정과 완성을 찾는, 거기서야 비로소 복된 약속과 사명과 책임을 확인하는, 개인적이지만 또한 ‘공동체적이고 우주적인’ 새 창조의 복음인 것이다.오늘날 이런 ‘새 언약의 복음’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음은, 모두 이단 사이비들이 가져가 변질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비극이며, 동시에 교회인 우리 자신의 귀에 울리는 경종이고, 그래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복음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한 시대의 교회를 괴롭히는 가장 큰 이단은, 그 주류 교회가 그 시대에 가장 외면한 복음, 진리를 가져다가 거짓으로 왜곡, 변질시키는 데에서 발생하는 암덩어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을 이어가는 일이나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과 우리가 가는 길을 조명하시지 않는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적인 종교 개혁적 전통을 따라서 걷는 길은 명확히 남아 있지만, 사실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의 본질적 생명’은 본질상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 거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임재의 신비 속에 지금도 살아 있지만, 오직 그 신비의 실체를 새롭게 경험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시대의 교회가 맞닥뜨리는 고난을 통해 성경의 말씀을 새롭게 보는 일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우리가 ‘근본으로 돌아가자’(ad fontes)라고 할 때, 그런 일은 사실상, 그렇게 돌아가는 ‘우리 자신’이 온전히 깨지고 부서져 전혀 새롭게 될 때에만 가능하고, 그것은 우리가 걸어왔던 옛 길이 아닌 새 길이 열릴 때 가능하게 되는 무엇일 것이다. 그래서 전통을 진정으로 계승하는 길은, 그 전통이 담고 있는 본질, 그 살아있는 신비, 그 말씀의 생명에 접촉하여, 그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는 길이며,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무엇인가 우리를 덮고 있던 보호막이 제한적이고 때로는 왜곡된 것임을 자각하고 벗어나는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상상할 수 없이 풍요한,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을 갖고 있다. 종교개혁 자체를 우상시하고, 그 역사와 경험을 계시의 말씀인 성경보다 우위에 놓지 않을 것이라면, 다시 이 땅의 교회가 맞은 고난을 끌어안고, 성령의 탄식을 듣고 좇으며, 다시 낮고 깨어진 마음으로, 부단히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거기서 이 땅의 교회를 치유하고 온전히 회복할, ‘온전한 복음’을 찾아내고 선포해야 한다. 교회의 회복은, 복음의 회복에서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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