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의 채플 목사였던 리처드 핼버슨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대형교회의 세습을 비판한 영화 ‘쿼바디스’의 김재환 감독은 이렇게 덧붙였다. “교회는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1)1) JTBC 뉴스룸 앵커 브리핑, 「JTBCnews」(2017. 11. 14).
기독교의 회귀? 분열!트럼프는 결국 재선에 성공했다. 트럼프 집권 2기를 앞두고 미국에서 기독교 가치를 표방한 정책의 회귀가 본격화하는 모양새라고 작년 말 모 기독교 언론이 다뤘던 내용이 기억난다.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성경을 구매하는가 하면 군부대 내 동성애 문제 등의 척결도 예고되는 등 바이든 정부와는 차별화된다는 내용이다.그러나 이러한 일부분의 변화로 기독교 가치의 회귀를 운운하는 것은 성급해 보인다. 다시 돌아온 트럼프가 온갖 일들에 위험이자 기회가 되는 것처럼 기독교계도 그리될 수 있어서다. 관련 내용을 살펴보다가 최근 류대영 한동대 명예교수가 월간 『기독교사상』에 기고한 글이 도움이 되었다. 요약하자면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였다.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사임하고 치러진 선거에서는 당연히 종교와 도덕성이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당시 남침례교인이었으며,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지미 카터는 보수적 신앙에 기초한 도덕성을 선거운동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그를 지지하여 당선에 이르렀다.이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그들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의 유수 언론은 1976년을 “복음주의자들의 해”라고 이름 붙였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 결집한 복음주의자들은 ‘도덕적 다수’로 대표되는 종교적 우파 단체들을 만들어 내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내용이다. 결국 미국도 (한국과 다르지 않게)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로, 아울러 트럼프 옹호자와 혐오자로 나뉘어 더는 하나 되기 어려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이미 이 상황을 예견했던 것 같다. 극단적 분열로 역사상 최악의 내전이 발생한 미국에서 내편이 아니면 바로 적이 되는 숨 막히는 현장을 담았다. 주인공인 기자들을 통해 내딛는 곳곳마다 영화가 아니라 진짜 공포라고 소개했는데 실제 예고했던 것보다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더랬다(어쩌면 미국과 한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가 이미 ‘시빌 워’의 상태가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끝까지 스크린과 현실을 오가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했는데 특히 대사 하나가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다. 주인공 일행이 길을 가던 중 한 무리의 군인에게 잡힌다. 주검들이 엉켜있는 구덩이 앞에서 군인 대장쯤으로 보이는 이가 묻는다. “당신들은 어느 쪽 미국인인가?”라고.
영화가 그리는 분열의 시대를 압축하는 메시지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도 그와 다르지 않은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당신은 어느 쪽 한국인이냐고?”, “어느 쪽 기독교인인가?”라고.현재 트럼프의 지지층은 트럼프 피격 이후 그를 열광적으로 추앙하고 있다. 그를 도왔던 미국의 복음주의 개신교 지도자들도 환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타적이어야만 하는 기독교인들이 배타적인 공약 등에 목숨 걸고 전선에 뛰어든 트럼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앞의 이유만으로 기독교 가치의 회귀라고 말하기는 그래서 더욱 어렵다.
최근 미국 정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복음주의자들의 권력 게임을 다룬 『나라 권력 영광』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여러 언론에 소개되며 나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이 책의 저자는 팀 앨버타라는 사람인데 공화당 텃밭인 미시간주 브라이턴이라는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랐다.
그 지역에서는 코로나19 때 무수한 유언비어와 음모론이 넘쳐났고, 그대로 복음주의 교회들에 퍼져갔다고 한다. 많은 기독교인은 앞선 이야기처럼 ‘너는 미국 사람이긴 하나 미국의 어느 쪽이냐?’를 물으며 극우가 되어 갔다.
극우에 기댄 교회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인들이 두 배로 늘고 헌금은 세 배로 늘었다. 그리고 목사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져 갔다. 정치평론가가 된 목사들도 많아졌다.십자가 대신 미국국가가 나부끼며, 결국 미국 기독교의 가치는 회귀가 아니라 훼손되어 가는 중이라고 말해도 전혀 불경스럽지 않은 상황이 됐다.더불어 미국 복음주의는 한국 극우 성향을 가진 교회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코로나 시절 방역 반대 시위를 벌인 한국의 보수 교회는 모 정당의 원내 대표를 뽑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고, 이제 정치인인지 목사인지 도통 분간하기 어려운 전광훈이라는 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 등에도 끄떡없이 준 신격화된 자신에게 열광하는 이들에게 더욱 거칠어진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다.그럼에도 여러 정치인이 그의 앞에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반감이 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에 한몫 아닌 큰 몫을 하고 있다. ‘보수 교단은 정교분리를 말하면서도 정치에 깊이 개입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라고 했던 「현대종교」 전 편집자문위원 정종훈 교수의 말에 선뜻 동의가 된다.계엄 이전에도 그랬지만 계엄 이후 한국 사회는 미국 사회처럼 이제 더는 하나 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 원인에 종교(인)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번 칼럼은 작심한 내용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나름 순화해서 쓰고 있으나 다른 때보다 더욱 꾹꾹 눌러쓴 이유가 있다.왠지 모를 송구함과 비겁함으로 오랜 시간 똬리만 틀고 있어서다. 쌓인 과제를 풀고자 하는 이들보다 꼬이게 만드는 이들이 늘고 있는 때에 정 교수의 말처럼 “세상이 썩어 문드러지면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세상이 어두워 갈 바를 찾지 못하면 빛이 되어 길을 밝히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임을 깨닫는 이들 역시 늘길 바란다.예수는 사라지고 정치만 남은 시대에 교회의 역할과 가치‘교회가 정치에 앞장설 수는 없지만 정치가 잘못 갈 때 교회가 바로잡아줘야 한다.’ 사역 전, 청년의 때부터 정치와 교회의 역할을 고민할 때마다 스스로 되뇌는 슬로건이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변함없는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때마다 교회가 희망이 되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그리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으나 녹록진 않아 보인다.종교의 힘은 줄어들고, 반대로 세상 시민들은 성숙해지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겠으나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달라는 기도는 점차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겉은 기독교인이나 실상은 못된 정치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기독교를 대변하고 있는 듯 보여서다.그들이 목사의 호칭으로 불릴 때마다 마치 이단 교주가 목사로 호칭되는 것만큼이나 괴롭고, 그들이 이 나라 기독교를 대표하는 듯한 언론 보도를 대할 때마다 커지는 거룩한 분노를 어찌할 길이 없다. 계엄 문제이건 정치 문제이건 간에 교회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해도 세상을 직시하고, 정곡을 찌르며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 있는메시지나 울림이 필요할 텐데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두루뭉술 겉도는 메시지만 난무하고 있다.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회가 정치에 앞장서지는 못해도 흔들리는 정치를 바로잡아줄 수는 있어야 한다. 아울러 작금의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되는 때임이 분명하지, 싶은데 그것이 마땅한 교회 존재의 이유이고, 교회와 믿음의 가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여 답은 back to the basics, 화해와 일치를 통해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없다고 믿는다.
신앙 공동체에서 믿음의 시간을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이들도 정치적 견해의 다름이 확인되면 쉬이 다투고 돌아서며, 분열로 이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한순간에 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정치 등 세상 것들이 신앙 공동체의 우위에 존재하며, 가족조차 돌아서게도 한다. 이단에 빠져 가족과 생이별하는 일들을 수없이 봐왔기에 종교의 문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정치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은 듯싶다.그럼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것은 기도이겠고, 기도 다음의 행보는 행동으로 이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일 테니 부디 포기하지 말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문제를 풀어갈 수 있었으면 한다. 믿음은 본디 배타적이기보다는 이타적이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신앙과 반하는 일이 생기면 일단 적으로 두고 멀리하는 일이 잦다.물론 이단은 외로 둬야 하겠으나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기보다는 화해와 평화를 기반으로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섬김과 포용이 또 다른 형태의 믿음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기에 믿음이 우선인가? 삶이 먼저인가? 라는 질문에도 자신의 믿음으로 상대방의 삶을 규정하지는 말아야 하며, 본질 아닌 것들이 조금 다르다고 해도 화해와 일치를 일구어 가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이것만으로도 작금의 정치와 사회적 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문제의 해결점을 찾지 못할 때도 있겠으나 다름은 틀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에 다름 안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찾아가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믿는 이들의 덕목이고 기본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라 확신한다.살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되는 상황에 놓인다면 하나를 선택하는 것보다, 비록 욕먹고 일을 망치더라도 둘을 하나로 만드는 일에 마음 더하는 것을 우리의 믿음과 신앙으로 여기며 살 수 있길 소망한다. 더불어 세상 사람도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분별하며 사는데 부디 엄한 것에 힘을 쏟거나 잘못된 길로 향하지 않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사람이 넘치기보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 섬김을 원하기보다 섬김의 기쁨 알아가는 교회,
세상이 주목하기보다 주님이 주목하는 교회, 화려한 겉모습보다 중심이 주를 향한 교회,
주님이 피로 사신 아름다운 교회, 서로를 사랑함으로 하나 되는 교회,
주님이 머리 되신 거룩한 교회, 우리 함께 만들어가요!
내 작은 생각보다도 하나 됨의 소중함 아는 교회, 세상에 알려지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깊이 아는 교회...- 요즘 가장 많이 곱씹으며 듣고 있는, 2015년 염평안 작사의 ‘교회’라는 찬양의 가사다.